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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년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ROTC와 인연을 생각한다(임관 30주년 출판기념회 투고글)

최재춘 2019. 4. 29. 11:31

54년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ROTC와 인연을 생각한다

 

임관 30주년을 맞이하여 54년의 내 삶을 파노라마처럼 잠시 반추해 본다

수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나의 고향은 신안이다.

보통 1004(천사)의 섬이라고 알려진 신안군 지도읍이 나의 어릴적 추억으로 한 바구니 가득 차 있는 곳이다.

내가 태어난 적거(積巨)리는 한때는 자염생산이 많기도 하였고 또 황토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내고향 적거리는 전주 최씨의 집성촌인데 적거리에 처음 입도조(入島祖) 하신 선조는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전주에 있던 장손집안을 피난시키게 되고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마지막 다다른 곳이 적거리인데 난이 끝나고도 마을인심과 주거환경이 너무나 좋아 다시 전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살게 되어 오늘날 집성촌으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조상의 역사에 대해서 어릴적 전혀 모르고 있다 나이 오십 넘어서 종친회 모임에 갔더니 8대조 선조께서 한성 판윤으로 계실 때 서울 숭례문을 또 전주에서는 풍남문을 축조하신분이고 특히 병자호란때 마지막까지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챙긴 영의정 최명길이 선조중에 한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지금은 문중 행사에 자주 참석하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전형적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천생 일부종사하시는 어머니 밑에 6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 당시만해도 자식이 재산인지라 보통 6명은 많지도 않은 숫자이다.

어릴때를 회상해보면 많은 농사를 일구는 장손집으로 일꾼들도 사랑채에 거주하며 제법 먹고 사는데는 문제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어 그 이후로는 상당히 힘들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도 바닷가 마을이라 생선은 참 푸짐하게 먹고 자랐으며 여름이면 그 바닷가 갯벌에서 수영하며 고기잡고 놀던 추억의 보따리가 지금도 나를 미소짓게 하고 있다.

특히 여름이면 일을 끝내고 마당에다 멍석을 깔고 옆에는 잡풀을 베어 모기불을 피워 그 연기로 모기를 쫓으며 어머님이 준비하신 저녁을 가족들 전체가 도란도란 앉아서 먹었던 소중한 어릴적 행복은 지금까지도 잊을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소중한 추억과 함께 시작된 초등학교는 약 10리길을 산길따라 걸어서 다니기 시작을 하였는데 전기가 없어 호롱불 밑에서 공부를 하던 초등학교 4학년경 섬이 연륙이 되고 전기가 들어오게 되니 전혀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길도 새롭게 신작로가 만들어지게 되고 버스도 들어오니 그 고립된 섬이 이제는 새로운 문물앞에 무방비로 무장해제 당하게 되는 상황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티브의 존재는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의 나래를 펴게 하였고 타잔을 보고 나서는 봄 가을에 무조건 산으로 가서 나무로 얼기설기 오두막을 짓고 칡넝쿨로 줄을 만들어 타잔과 흡사한 놀이를 하였고 김일의 레스링이나 홍수환의 권투시간에는 온 마을이 전부 티브가 있는 집으로 향하게 되고 그럴 때 티브를 가진 집에서는 은근슬쩍 담뱃잎을 고르는 일감을 내놓게 되고 우리는 그 일을 하면서 눈과 귀는 온통 티브에 열중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게 되고 중학교는 바로 옆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는데 그때까지도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집안 일을 도와주며 틈틈이 공부하며 중학교를 마쳤던 것 같다.

그래도 공부는 항상 상위권을 유지해서 크게 부모님께 학비 부담은 주지 않은 것 같다

보통 그때만 해도 중학교를 졸업하면 대부분 도시로 돈벌러 나가고 일부만 목포나 광주로 진학을 하였는데 딱 우리가 졸업하는 해에 고향에 고등학교가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1회 신입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허허벌판에 지어진 학교라 체육시간과 교련 시간은 대부분을 운동장을 고르고 나무를 심고 하며 그렇게 3년의 시간을 학교를 학교답게 만드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꿈많던 고등학교는 쏜살같이 지나가게 되고 졸업은 다가오고 나는 오랜 고민끝에 광주로 대학을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타지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입학과 더불어 아는이 하나 없이 거닐던 교정에는 여기저기 동문들 모임이며 고향 모임이며 게시판을 가득채운 그 전단지 속에 나를 부르는 글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1회이기에 새로운 길을 내가 개척해야 하는 숙명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고등학교 동문은 유일하게 나혼자 였고 그 유일함은 내가 졸업하는 4년동안 그대로 유지되어 나는 단 한번의 동문 모임없이 4년의 대학생활을 마치게 되는 전무후무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그래도 워낙 성격이 낙천적이고 기 죽지 않는 스타일인지라 꿋꿋하게 다녔고 또 워낙 운동을 좋아하는 무인 기질이기에 당연히 2학년때부터 학군단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또 지원을 하여 3학년때부터 1년차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입단식을 하기 위해 모인 공대 강의실에 2년차 선배들의 소등소리에 눈감으라는 소리인지는 모르고 전기 스위치를 내리지 않나 여기저기 우당탕 소리에 정신없이 가입교를 끝내고 그전과는 다르게 교련복이 아닌 단복이 나오기까지 우리는 양복으로 갈아입고 1년차 생활을 시작하였다.

입수보행을 못하게 한다고 아래쪽 그리고 상의 주머니는 전부 실로 꿔매고 그리고 안쪽 주머니에는 빨강 파랑 검정 볼펜과 오천원을 흰봉투에 넣어 다니게 하는 이상한 전통의 1년차 생활이었다.

봄이 되자 법대 앞 교정에는 하얀 목련이 피기시작하고 무등산 자락에는 하얀 눈이 아직 그대로인데 2년차 선배들은 우리에게 하얀 목련이 두 번 필때까지 그리고 무등산의 하얀 눈이 녹아 다시 얼때까지 죽었다고 복창하라는 것이다.

생소한 억압과 통제는 조금은 불편하였지만 그렇다고 견디기 힘들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끔씩 다른 단대 선배들이 불러 반성문을 삼색 볼펜으로 글자 한자 한자 색깔별로 틀리게 쓰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가 조금은 나를 슬프게 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1년차 생활의 별미는 보안집합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후보생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보안집합과 단대별로 하는 보안 집합이 있는데 단대별로 하는 보안집합이 많았다.

몇월 몇일 몇시 장소는 어디 이렇게 선임동기에게 지침이 내려오면 우리는 잠도 자지 못하고 기다리다 새벽 2시경 해당 장소에 모이기 시작을 하는데 처음에는 그 시간을 기다리다 깜박 졸아 단 한명이라도 늦거나 못오게 되면 단체로 얼차레를 받고 그 날 보안 집합은 실패로 다시 보안 집합이 소집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요령이 생겨 보안 집합이 걸리면 전부 모텔을 잡고 한꺼번에 합숙을 하다 그 시간에 맞추어 한명씩 한명씩 방향도 틀리게 그 장소에 10분전에 전원 집결해 밤새도록 우리는 하나다는 구호를 외치며 얼차레를 받곤 하였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무등산 중간 자락에 어느 묘소에 보안 집합이 떨어졌고 우리는 달밤에 그 산속을 찾아 모였고 두시간동안의 얼차레를 한후 선배님의 말씀이 이 묘소가 바로 보안 집합중 죽은 선배의 묘라고 하며 전부 큰절을 시키는데 나중 그것이 전부 거짓이라기에 우리는 절대 그러지 말자고 다짐했던 기억이 지금도 아련하다.

1년차 학군단 생활중 가장 흑역사라고 하면 역시 피복고와 명예위원실이 아닌가 생각을 해본다.

보통 교육을 마치고 피복고에 들어오면 보통 30분에서 한시간정도를 얼차레가 진행되는데 땀으로 범벅되는 그 장소가 피눈물의 피복고였던 것이다.

그리고 한단계 더 혹독한곳이 명예위원실인데 오는 선배들마다 얼차레를 하는데 아무튼 지금도 쳐다 보기도 싫은 곳이 명예위원실이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하얀 목련이 다시 피니 2년차가 되고 우리는 그 만큼의 책임감 속에 이후 임관을 준비하게 된다.

훌쩍 지나가는 2년차의 생활을 뒤로하고 우리는 어느새 31사단 연병장에서 오만광촉 빛나는 소위 계급장을 어깨에 달고 임관을 하게 된다.

4개월의 상무대 교육은 나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시골에서 워낙 산으로 바다로 뛰놀던 삶이 바탕인지라 모든 훈련이 어렵지 않고 재밌기만 하였다.

특히 유격에서 참호 전투나 레펠 산악행군은 다른 어려운 동기들을 챙겨가며 할정도 이었기에 모두들 공수부대가 딱 적성이라고 하였지만 굳이 지원을 하지 않았기에 일반 보병사단 오뚜기 8사단으로 배정되었다.

하지만 일부 동기들은 교육사단이라 힘들것이라고 위로도 하였지만 체력에는 자신이 있기에 별로 개의치 않고 포천으로 입성하였다.

이동에 있는 사단에 들어서자 우리를 기다린 것은 그 유명한 포천 막걸리였고 아마도 그날 마신 막걸리가 내가 포천에서 맛있게 마신 처음이자 마지막 막걸리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곧이어 우리는 바로 차돌대대에 3명의 동기와 함께 배속되었는데 웬걸 선배들은 7명이나 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은 불안감이 엄습을 했지만 그래도 3명의 동기끼리 함께 BOQ에 숙식하며 적응을 할 일주일 무렵 3개월 야외훈련이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그 무더위에 첫 행군인지라 쉬는 중에도 군장 한번 벗지 않고 도착지 승진 훈련장까지 무사히 소대원 전원을 인솔후 야산에 천막을 치고 선봉섬멸 작전을 시작하였다.

육군과 공군의 화력 시범을 하는 훈련인데 3개월동안 똑같은 고지를 매일 방탄조끼를 입고 공격 앞으로를 하는데 그렇게 힘든 훈련은 아니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지내는 어느 휴일날 동기생 전원이 외출을 하는데 일곱명의 선배들이 밤에 불러내고 드디어 또 1년차의 그 얄굳은 환영 의식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환영식후 밤새 술을 마시게 하는데 맥주병이 그 술집을 한바퀴 돌아야 하는 맥주를 몇 짝씩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3명의 동기들이 일곱명의 선배들에게 시달리는 환영식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그후에 선배들은 전역하는 그날까지 우리들에게 매번 술을 살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ROTC는 뭔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알수 있었다.

3개월의 훈련을 끝내고 부대로 돌아오니 또 보름만에 추계진지 구축을 떠나고 또 돌아와서 일주일만에 겨울 혹한기 훈련 그리고 봄 되면 춘계진지 구축 이어서 팀스피리트 한미군사훈련 또 하계 훈련으로 이어지는 야외 훈련은 영내 생활을 전혀 알수 없게 만들었고 오히려 야외 생활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1년이 훌쩍 지나고 이제는 중위로서 선임 소대장으로서 역할을 하려고 하는데 연대에서 호출이 오는데 사단 연락장교로 가라고 하는것이 아닌가.

겨우 자리잡고 이제야 한번 폼 잡고 제대로 된 소대장 한번 하려는데 웬 날벼락인지..

다른 부대 동기는 그 연락장교를 가려고 신청을 하는데 가고싶지도 않은 나는 선배들의 추천으로 부득이 벙커라는 새로운 환경속에서 하루내 전화통을 붙잡고 또 1년의 생활을 사단 연락장교 임무를 수행하였다.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는 또 의미가 있는 생활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또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어느새 전역 날짜는 다가오고 여기저기 원서를 내면서 새로운 사회 생활을 준비하는데 다행히 원하는 몇군데 회사에 합격을 하여 전역한 다음날 출근을 하게 되었다..

군인 정신으로 무장한채 시작된 신입사원 시절은 학연이 전무한 나에게 그나마 ROTC동기들과 선배님들이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무난한 회사생활이 가능하였다.

그리고 군산으로 새롭게 공장을 건설하여 내려오니 지역에 ROTC모임 또한 활성화 되어 있어 타지지만 외롭지 않게 선후배님들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되니 나에게도 수많은 학연의 동문들이 생기는 기쁨이 생기게 되었다.

지금도 ROTC는 나에게 있어서 삶의 원동력이고 또 지역사회에서 열심히 살아갈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고등학교를 1회로 졸업하여 선배가 없었던 나의 슬픈 운명은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로 마감되고 이후 ROTC와 함께 한 내 삶은 나에게 수많은 선후배를 값진 선물로 주었고 이분들과의 소중한 인연은 세대를 넘고 지역을 뛰어넘어 지금도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다.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오백겁의 인연이라고 하는데 ROTC라는 이름으로 함께한 우리들에게 있어 그 전생의 인연은 말로서는 다 형언할수 없는 인연임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나의 인연들과 함께 좀더 따뜻한 사회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며 그 길을 향해 발걸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올해 임관 30주년으로 함께한 그 인연 40주년 50주년 60주년에는 더욱더 알차게 열매 맺을수 있도록 쉼없는 발걸음 내딛어 보려고 한다.

나는 지천명을 훌쩍 넘긴 지금에도 ROTC를 나오고 또 함께한 그 시간들이 내가 인생에서 선택한 가장 멋지고 훌륭한 선택임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오늘도 기쁜 마음이다.

그리고 다가올 우리들의 함께할 소중한 인연을 손꼽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