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봄꽃이 경쟁하듯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봄의 전령사로서 그들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산에는 분홍빛 진달래가 언덕배기에는 노오란 개나리가 앞집 정원에는 하얀 목련이 그리고 길가 가로수에는 화사한 벚꽃이..
그런데 출근길 군산은 어제부로 벚꽃 축제가 끝났는데도 새색시마냥 부끄러움으로 가득찬 화사한 얼굴을 이제야 내밀고 있다.
군산 경제가 어렵다고 벚꽃마저 이리 힘들어하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피지도 않은채 벚꽃 축제를 마치게 된 행사하시던 분들도 대략 난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날씨가 좋으면 이번주말 정도가 최고조로 만개되어 온 시내를 벚꽃 세상으로 만들것 같다.
벚꽃이 보고 싶은 분들은 이번주말정도 군산으로 오시는것이 좋을듯 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책을 잠시 보는데 몇해전 유행하던 정의란 무엇인가를 저자가 이야기 하기에 참으로 어렵게 쓴 마이클 샌덜에 책을 인내하며 읽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 이기에 더욱더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간절해서 어려운 그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인문학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는 우리 사회의 높은 수준의 교양을 평가해야 할지 아니면 부정의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을 슬퍼해야 할지 우리 사회의 부조화가 나를 힘들게 한다.
그러면서 난 문득 중학교 1학년 시절의 정의롭지 못한 아픈 기억을 떠올려본다.
학교에서는 봄이면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배정되고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알기위한 명목하에 가정방문을 하게된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여기저기를 잘 다녀서 어느정도 길에 익숙한 내가 선생님을 모시고 길잡이가 되어 함께 가정방문을 다녔다.
빈곤한 시골집 가정방문은 그 자체가 민폐임에도 선생님은 씩씩하게 다녔고 어려운 집에서는 그래도 선생님 방문인지라 환타에 찐 게란을 때론 콜라에 새우깡을 내놓으셨다.
그나마저도 힘든경우는 설탕물을 내놓기도 하셨는데 부지기수는 대접할것이 변변치 않기에 그냥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다.
그런데 어느집을 갔는데 친구 어머님이 기다리고 계시다가 꼬깃꼬깃 돈을 건네시고 선생님은 나의 눈치를 보면서 겸연쩍은듯 얼른 주머니에 받아 넣는 그 오천원이 나중 정의롭지 못한 나의 아픈 기억이 될줄이야..
보통 중학교때는 네번의 납부금을 내는데 반에서 4등까지 납부금을 면제해 주었다.
첫 시험에서 나는 다행히 반에서 4등을 하였고 당연히 납부금을 면제 받아 부모님 짐을 덜어들일거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부르더니 면제받은 납부금 반을 5등에게 나누어 주리고 하는것이다.
어찌 이런일이 반론한번 이야기하지 못하고 5등한 친구를 보니 아뿔싸 그때 가정방문 오천원 그 친구가 아닌가.
그 이후로는 절대 반을 나누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공부를 하였고 반에서 1.2등을 나중에는 학년에서 1등을 하였다.
그래서3학년 올라갈때는 학년에 남녀 1명씩 주는 아산 조방원 선생님 장학금을 받았고 3학년 졸업할때도 남학생 전체 1등으로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졸업이 가까워져 오자 국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교육장 상을 받기 위해서는 선생님들께 밥을 사야 한다고 넌지시 이야기 하는데 내 형편상 고생하시는 부모님께 그리 부담을 줄수가 없어 밥은 살수가 없다고 이야기 하니 졸업식날 교육감상도 교육장상도 모두 여학생 차지가 되고 마는 또 한번의 정의롭지 못한 슬프고 아픈 기억이 나의 한페이지로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의 삶이 우리 사회가 좀더 정의로운 사회의 밀알이 되는 그 길을 가고 있지 않나 생각을 해보면서 봄 햇살처럼 따뜻함이 우리사회 모두에게 골고루 내리쬐는 그래서 정의롭지 못한 아픈 기억들이 사라지는 그날을 위해서 오늘도 작은 발걸음 한걸음 내딛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