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시월도 소리없이 지나가고 있다.
세월이 달리는 속도가 참 빠르다는것을 새삼 절감해본다.
어제 저녁에는 오랜만에 역사저널 그날을 옆지기와 함께 보았다.
이번주 동학혁명관련 시극을 공연한다고 몇달간 준비를 해서 그런지 옆지기가 피곤함에도 유난히 동학혁명관련 방송은 열심히 시청을 하고 있다.
방송을 보면서 나는 동학혁명에 대한 또다른 역사적 재평가를 알게 되었고 또 무능한 지도자가 순간의 잘못된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역사속에서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동학혁명은 1894년 1월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폭정에 시달리던 농민과 동학교도들이 혁명의 깃발을 높이 쳐들고 봉기하기 시작하면서 그 서막을 알리는데 정부는 안핵사 이용태를 보내 농민군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하며 1차 봉기는 큰 피해없이 농민군의 해산으로 마무리되게 된다.
그러나 이용태는 농민군이 해산하자 곧바로 반란으로 규정후 온갖 탄압을 하게되고 이에 동학교도와 농민들은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등을 중심으로 3월에 다시 2차봉기 하여 황토현 전투에서 정부군을 격퇴하고 바로 전주성으로 돌진하게 된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보내 진압하고자 하는데 홍계훈은 농민군에게 패하면서 진압의 어려움을 조정에 알리게 된다.
이에 민씨와 고종은 농민군의 요구를 듣고 그 부당함을 해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한채 외세의 힘을 빌려 자신의 국민인 농민군을 소탕하려고 청군에게 파병을 요청하게된다.
이에 일본군은 청군의 파병을 구실로 함께 들어오게 되고 농민군은 외세의 각축장이 될까 우려해 바로 정부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하게 된다.
이제 외세가 주둔할 명분이 사라졌음에도 청군과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서로 호시탐탐 조선을 넘보며 기회를 보다 먼저 일본이 7월 23일 경복궁을 습격 조선군을 죽이고 친일 내각을 꾸미게 된다.
이어서 일본은 청군에 전쟁을 선포하고 공격을 개시하여 해전에서 육지에서 연전연승을 하게되니 조선땅에서 일어나는 외세의 청.일전쟁을 보면서 동학농민운동은 9월에 3차 봉기를 하게된다.
부패한 정치가와 외세를 타도하여 나라를 바로잡고자 봉기한 농민군은 오로지 그결의와 애국심하나로 변변치 않은 무기인 죽창과 화승총 그리고 농기구로 무장한채 최신의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우금치에서 마주하게되고 1만의 이름없는 농민군의 피는 곰티재를 처절하게 물들이게 된다.
그리고 대다수의 동학농민군은 전사하게 되고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귀결되는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학농민 혁명은 겉으로는 실패한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불씨는 그 정신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고 이후 항일독립 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로 4.19의거로 그리고 5.18 광주민주화 운동, 촛불혁명으로 면면히 이어오면서 더 크게 부활을 하였다.
결국은 비록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못난 지도자는 자신들의 안위만 걱정했지만 이땅의 이름없는 민초들은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초개와 같이 바치면서 역사의 부름에 함께 하였고 이러한 동학농민 혁명의 그 큰 울림은 오늘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