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인가 일본 노동 단체로 부터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때 행사장에 빨간 완장을 차고 행사를 진행하는 일본 노동단체 간부의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일제시대나 한국전쟁을 통해 완장의 무자비함을 생각하며 소름이 돋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어딘지 낯설지 않은 아이러니 느낌이 들었다..
그 배경에는 바로 중고등학교 시절 선도부의 완장이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완장은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때론 자신의 지위에 걸맞지 않게 권력을 남용할때 "완장을 차다"가 부정의 이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팀의 주장으로서 완장을 차다고 할때는 그 막중한 역할과 책임이 뒤따름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오늘자 신문에는 상주 완장이라는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고 김영삼 대통령 국가장에서 상주들이 완장을 차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신 나비 리본을 왼쪽 가슴에 착용을 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 언제부터 장례식에 완장을 차기 시작하였을까?
분명 완장의 문화는 우리의 전통문화가 아니다. 일제시대 고종이나 순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항일운동의 기세가 높아지자 조선 총독부는 1934년 의례준칙을 통해 그들의 완장 문화를 우리에게 강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는 고인에 대한 예우와 상주의 식별을 위해 지방마다 조금은 차이가 있으나 보통 남자가 돌아가시면 왼팔에 여자분이 돌아가시면 오른팔에 완장을 차고 또 완장의 줄도 두줄은 고인의 아들이나 사위가 한줄은 친가는 8촌이내 외가는 4촌이내 그리고 무줄은 미혼자나 대개 손자들이 찬다.
대신 여자분들은 검정색이나 흰색 한복에 머리에 리본을 하는데 고인이 남자일때는 왼쪽에 여자일때는 오른쪽에 리본을 패용한다.
한편 장례식때 고인에 대한 삼베 수의가 여러가지 품질과 가격으로 논란이 많으나 우리의 전통은 삼베 수의가 아닌 살아계실때 가장 즐겨 입었던 가장 고운옷을 고인에게 입혀 드렸던것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고 삼베 수의도 일제시대 장례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할것이다.
따라서 고 김영삼 대통령 상주분들은 일제시대의 완장을 거부하고 나비 리본을 차고 국가장을 치루었다는 것이다.
관혼상제에 특히나 형식과 절차를 따졌던 유교의 조선에서 우리의 장례문화는 일제 식민지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 간소화 되었지만 너무나 형식과 절차에 얽매이다 보면 정작 살아생전에 제대로 된 효를 해야 함에도 고인 중심으로 흘러가기에 장례는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무엇보다 살아 생전에 열성을 다하여 효를 실천하는것이 중요하다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