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보통 설, 추석 명절이나 축하할 일인 결혼, 생일 또는 이사를 했을때는 떡을 해서 함께 나누어 먹곤 하였다.
떡은 곡식 가루를 이용 반죽하여 찌거나 삶거나 익혀서 만들곤 하였는데 특히 떡가루를 만드는 그 어려움은 떡의 귀함을 한층 더 업그레이드 하였다.
때론 집에서 디딜방아로 쌀을 빻아 떡가루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대부분 명절때는 읍내 장터에 떡방앗간 집을 이용하였다.
특히 방앗간은 적은데 떡은 만들어야 하고 아마도 그 순위 쟁탈전과 기다림 속에서 명절 음식 절반은 이미 떡방앗간에서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새벽녘에야 겨우 차례가 되어 떡 가루와 가래떡을 만들어 지게에 지고 추운 밤거리를 달님과 별님을 벗삼아 집으로 돌아오던 발걸음은 너무나 가볍고 가슴 뿌듯한 기억이 지금도 아련히 남아있다.
이러한 떡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출토된 시루 유물이나 문헌에도 우리 민족은 농경 문화와 함께 떡의 역사도 함께 한다고 유추해 볼수 있을 것이다.
떡의 종류는 시루떡, 찰떡, 절편, 꿀떡, 송편, 바람떡, 백설기, 가래떡 인절미등 그 종류도 수십가지로 지역에 따라 적절하게 그 지역의 농산물을 이용하여 맛있게 만들어서 우리 선조들은 드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KBS 역사저널 그날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인절미 떡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조선 중기 신하들은 광해군을 끌어 내리고 인조를 등극시키는 인조반정(1623년)을 일으키고 그때 무신의 중심에 이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인조 2년(1624년) 이괄은 다시 역모로 몰리게 되고 급기야 이괄은 군대를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는 반란을 일으키고 인조는 역모를 피해 공주까지 피난을 하게 된다.
추운 겨울날 피난온 인조에게 신하가 떡을 올리니 이게 무슨 떡이냐고 물으며 정말 절미(絶味:맛이 빼어나다)라고 이야기를 하며 맛있게 인조가 떡을 먹으니 신하는 임씨라는 백성이 만들어서 가져온 떡이나 이름은 정확히 모릅니다 라고 답을 하였다.
이후 임씨가 만든 절미의 떡이라 하여 임절미로 부르다 다시 인절미로 부르기 쉽게 변했다는 이야기다.
떡은 아마도 공동체 생활 나눔의 철학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음식인지 모르겠다.
대부분 떡은 혼자 먹기 위해서 만들기 보다 함께 나누어 먹기 위해서 만드는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개인주의 이기주의가 더 활개치는 요즘 세상에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깃든 나눔의 떡 상생의 떡을 더욱 그리워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