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에는 외사촌 형님으로부터 두류단과 관련된 글을 받았다.
막연히 두류단이 조선후기 유배를 온 유힉자들이 머물던 곳이라는 기존의 선입관을 뛰어넘는 조선 후기 유학의 마지막 성지로서 그 역할을 하였던 두류단 관련 글을 읽고 새삼 그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조선 유교의 큰 흐름도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를 주요 사상학문으로 태어난 조선은 주요하게 율곡 이이를 축으로하는 기호학파와 퇴계 이황을 축으로 하는 영남학파가 대세를 이루며 서로간에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조선을 이끌어왔으며 조선 후기들어서는 네분의 유학자 중심으로 학문이 이루어 졌는데 기호학파에 근원을 둔 화서학파 이항로 노사학파 기정진 간재학파 전우 그리고 영남학파에 근원을 둔 한주학파 이진상이었다.
그중에서도 지도는 바로 화서학파와 관련이 깊다. 화서 이항로에게는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유인석등 조선말 내노라하는 절개가 곧고 충직한 유학자들이 많았다.
그중 중암 김평묵은 위정척사 사상으로 똘똘뭉쳐 대원군과 함께 척양을 외쳤으며 이로 인하여 고종의 미움을 사 1881년 지도로 유배를 오게 된것이다.
지도 백련마을에 안착하게 된 김평묵은 주변에서 소문을 듣고 온 제자들을 거둬 가르치게 되고 화서학파의 뿌리를 지도에 뿌리는 계기가 되었다.
때마침 지도가 해양지리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지도군이 설치되고 일군 일교에 따라 향교가 세워지고 이로인하여 지도에 유학은 조선말 더욱더 꽃피우게 되었다.
무안을 비롯 인근에 있는 임자 증도에서 내노라 하는 사람들은 전부 중암에 제자 되기를 청하여 수학하니 두류단은 바로 그분들의 얼과 사상이 올곶이 베어 있는 마지막 조선의 유학 성지로서 현재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매년 9월 보름이면 지도를 비롯 인근의 유학자들이 모여 화서 이항로 노사 기정진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본아 나유영 다섯분의 유학자를 기리며 제를 올리는데 그 제단과 그리고 두류단 봉우리에 화서학파의 정신이 깃든 바위의 글들이 세월의 무상속에서도 의연히 남아있다..
조선말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충효를 중심으로 한 그 사상만큼은 결코 이시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기에 두류단을 조선의 마지막 유학의 성지로 하여 후세에게 좋은 교육의 장으로 만들었으면 하는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