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길이 예 있음에 난 가난단 말도 못다 이르고 가노매라 어느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같은 나무가지에서 나고도 가는곳을 모르겠구나 아아 극락에서 다시 만나볼 나는 불도를 닦으며 기다리겠노라.."
신라 경덕왕때 스님 월명사가 지은 제망매가(祭亡妹歌)라는 향가다 죽은 누이를 그리워 하며 자연의 냉혹한 섭리와 불교의 윤회사상을 바탕으로 슬픔을 종교적으로 승화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시다.
고등학교때 시험 문제 나온다고 자주 외웠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이나 예나 이별의 슬픔은 결코 다르지 않다 특히나 그 이별이 예기치 않은 이른 이별일 경우에는 더욱더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그 슬픔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어릴적 우리 고향까지 넘어 왔는데 고향에서는 이러한 슬픈 이별을 독특한 무덤 양식으로 변화시켰는데 우리는 그것을 초분(草墳)이라고 불렀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바다에서 몇날 몇일 고기잡이를 하다보면 집에서 발생되는 슬픈 이별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고기잡이를 떠났던 가족들이 얼굴보며 떠나 보낼수 있게 바로 장례하지 않고 이중으로 장례를 치루는 초분이 생겨난것이다.
초분은 우선 돌아가신분을 관에 넣어 바닥을 반듯한 돌로 평평하게 다진후 그 위에 관을 올려 놓고 그 관을 짚으로 몇겹이나 두른후 다시 새끼줄로 튼튼하게 동여 맨다.
그리고 약 2~3년 정도 초분에 보관을 하다 육체가 다 이탈을 하면 뼈만 다시 모아 땅속에 봉분을 마련 성대하게 장례를 치루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또렸이 남아 있는데 중맥산 공동묘지에 가보면 초분이 여럿 놓여 있었고 그 초분을 별 두려움 없이 들락 날락 하였던 기억이 난다.
어떤 초분은 전혀 안으로 들어갈수 없도록 막아져 있던 반면 어떤 초분은 안으로 쉽게 들어갈수 있도록 천막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어 쉽게 들어가서 관도 보고 하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장례 문화중 하나인 초분은 그 당시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어려운 경제적 여건속에서도 복장제를 할수 밖에 없었던 서글프고도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장례문화였던것이다.
지금은 고향에 가면 마을에서 하던 장례문화도 대부분 장례예식장에서 간단히 치루어 낸다. 발인 하루전날 모여서 상여소리 연습도 하고 호상일때는 날밤을 세워가며 노래 부르며 왁자자껄 놀던 고향의 장례 문화도 지금은 조용하게 형식적으로 그렇게 마무리되는것 같아 조금은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시대가 바뀜에 따라 장례 문화도 바뀌어야 한다는것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기에 그 냥 추억속에 장례문화로 초분을 기억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