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릴적 초.중등 학교에서 조선시대 치욕적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배우면서 왜 우리는 평상시에 군비를 제대로 준비해 놓지 않아 무참하게 백성들이 침탈당했을까 하고 당시 집권을 했던 세력들에 대해 상당히 원망과 분노의 마음을 가졌던적이 있다.
특히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김성길(일본전혀 전쟁할 의도 없다)과 황윤길(일본 전쟁준비 가능성 농후하다)은 똑 같이 보고와서도 전혀 다른 내용을 당파적 입장에서 보고하여 적들의 침략에 전혀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애석함은 한편으로는 조선중기 당파의 심각성과 또 그러한 내용을 듣고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지도부 책임까지 참으로 지리멸렬한 모습들이 안탑깝기만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이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0년전 율곡은 경연에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10만 양병설을 주장 하였고 이에 서애 유성룡이 이 평화로운 시대에 민심을 동요시키는 10만 양병설이냐고 반대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볼때 율곡 이이는 미래를 내다보는 선각자였고 거기에 비해 서애 유성룡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게 한 장본인이 되고 만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 아닐때는 때론 역사는 진실과 관계없이 승자의 논리로 가득 채워지는데. 만일 이 또한 누군가가 당파의 입장에서 그들의 입맛에 맞게 썼다면..
최근 이러한 십만 양병설의 허구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실제로 10만 양병설이 처음 문헌에 나오는것은 이이의 제자인 사계 김장생이 이이의 생애와 언행을 적어 놓은글 율곡행장에 처음 나오는데 이를 더욱더 구체화 시킨것이 후에 율곡 이이 계통의 서인들이라는것이다.
실제 국가의 공식 문서에 처음 십만 양병설이 나왔으면 이런 논란은 일어 나지도 않았을것인데 임란후 쓰여진 조선실록이나 각종 사료에는 나타나지 않던 십만 양병설이 김장생이 쓴 율곡행장후 여기 저기에서 그 근거를 가지고 좀더 구체화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당파의 영수급인 유성룡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능한 사람으로 격하시키기에 이러한 내용들이 당파적 입장에서 조작되었다는것이다. 실제 임란시 유성룡은 이순신 권율을 천거하여 어렵고 힘든 싸움에 그나마 가장 훌륭하게 대처한 인물로 평가를 받는데 또 한쪽에서는 또다른 평가를 하는 부분이 아쉽기만 하다.
아무튼 우리가 잘 아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아들로 아홉번 과거에 응시에 아홉번 장원을 한 구도 장원공 율곡 이이 분명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또다른 사람을 희생으로 그 업적이 더 부풀려 지는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결코 진실을 덮은채 역사가 왜곡되어서도 안될것이다.
십만 양병설 논란의 중심에는 당파적 시각이 분명히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그 논란속에 애꿎은 백성들은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진실은 결코 묻히지 않는다는것을. 그리고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것을..언제나 그 곳을 향해 쉼없이 한걸음 한걸음 뚜벅뚜벅 걸어가는사람들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