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김병연)의 생애
김삿갓의 본명은 김병연(金炳淵, 호는 난고蘭皐, 1807-1863)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평안도 선천부사였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게 되자 노복 김성수의 도움으로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에
도망가 살았다. 후일 멸족(滅族)에서 폐족(廢族)으로 사면되어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걸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강원도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반역으로 인한 죄는 연좌죄로 가문의 3대를 멸족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이들 모자
가 처벌되지 않았던 것은 당시 실권세력이 안동김씨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리하여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으나, 조부 金益淳이 반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이 폐족
이었기 때문에 떳떳한 사대부로는 지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양반가의 기풍을 갖춘 金炳
淵의 어머니는 인적이 드문 산골에 은거하면서 아들에게 틈틈이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을 알지 못한 채 학업에만 정진하여 온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에
응시하여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牛天]이라는 詩題로 장원급제하였다.
뛰어난 글 솜씨로 장원을 하게 된 김병연은 그 후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에 대해 전해
듣고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감과 폐족의 자손이라는 주위의 멸시 때문에
20세때 처자식을 둔 채 방랑길을 떠난다.
이때부터 김병연은 죄인으로서 하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하여 삿갓에 죽장을
짚은 채 돌아다녔다. 금강산을 시작으로 전국 8도를 떠돌았으며 도산서원 근처와
황해도 곡산 등지에서는 훈장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라도 화순에서 한 많은
삶을 마감하였다(1863년). 이렇듯 그의 생애는 시대에 대한 恨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가 남긴 여러 편의 詩에서 이러한 그의 심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근래에 강원도 영월에서 그의 詩碑등 유적복원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김삿갓이 원한의 땅인 조부의 수난임지였던
(선천)에 갔을때 차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온종일
성문밖을 서성대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가까운 글방을 찾았었다.
그러나 젊은 훈장의 태도가 너무 쌀쌀해서 욕시 한수를 건네주었다.
書堂乃早知 서당 은 내조지 요
房中皆尊物 방중 은 개존물 이라
生徒諸未十 생도 는 제미십 이고
先生來不謁 선생 은 내불알 이구나
글방을 알고보니 좌중이 모두 거만하구나.
생도는 열도 못되면서
선생은 와서 뵙지도 않는구나
시의 뜻은 욕이 아니지만 소리내어 읽던 훈장은
목침을 잘못 던져 학동의 머리를 깨고 말았다.ㅋ~`
그도 사내 라서 음담을 알았던가.
하마터면 동거까지 할뻔한 가련이라는 늙은기생의
딸과 불 끄고 나눈 이야기가 전해온다.
삿갓 : 毛深內闊必過人 모심내활 하니 필과인 이라
숲이 깊고 속이 넓으니 분명 누가 다녀간게 로구나
가련 : 後園黃栗不蜂裂 후원황율 은 불봉렬 이요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유 는 불우장 이라오
뒷산 노란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지고
개천가 버들가지는 비 안 맞아도 잘자라 늘어 진다오.
秋美哀歌靜晨竝 (추미애가정신병)
가을날 곱고 애잔한 노래 황혼에 고요히 퍼지니
雅霧來到迷親然 (아무래도미친연)
우아한 안개 홀연히 드리운다
凱發小發皆雙然 (개발소발개쌍연)
기세 좋은 것이나 소박한 것이나 모두가 자연이라
愛悲哀美竹一然 (애비애미죽일연)
사랑은 슬프며 애잔함은 아름다우니 하나로 연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