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합창?
5월이다.
수많은 기념일이 함께하는 5월 유독 오늘날까지 갈등과 논란이 이어지는 날이 5.16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다.
특히 최근 논란의 중심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 식순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으로 부르느냐 합창으로 부르느냐의 문제로 정치권과 정부의 논란이 뜨겁다..
제창과 합창의 차이는 식에 참석하는 사람이 노래를 함께 부르는것이면 제창이고 자율이면 합창이다. 그러나 제창일지라도 본인이 동의가 안되면 안부르면 되는데 굳이 국론분열 이야기 하면서 합창을 고수하는 보훈처의 역사인식과 정부의 정치논리가 궁색하기만 한것같다.
특히 이 노래를 북한과 연계해서 정치논리화 하는 정부의 입장을 들어보면 과연 이 정부가 광주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통합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러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어떤 노래인지 그 탄생 사연을 들여다 보면 지금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북한과 관련성은 허접한 정치논리임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은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의지를 폭력으로 진압하고 민주인사를 투옥시킨다. 그때 민주인사인 백기완 선생님이 투옥되고 수많은 고문속에 피폐해진 몸을 추스려 80년 12월 감옥에서 시를 쓰니 그 시제목이 묏비나리(순수한 근원상태에서 빌고 축원하는 행위)다.
그리고 1981년 광주에서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기리는 창작극을 준비하였고 그 창작극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해서 황석영씨가 백기완 선생님의 시 묏비나리의 중요부분을 발췌하여 작사를 하고 전남대 대학가요제 출신 김종률씨가 곡을 만들어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러나 노래는 차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고 한해가 지나 광주에서 들불 야학을 하다 불의에 사고로 78년 숨진 박기순 열사와 80년 광주민주화 운동때 시민군 대변인을 지냈던 윤상원 열사의 영혼 결혼식을 1982년 2월 망월동에서 거행하게 되었고 이 노래는 두분의 열사를 위해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 불리어지게 되고 이후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속에서 탄생한 임을 위한 행진곡은 그 숱한 군사정권의 서슬퍼런 탄압과 역경속에서도 광주 민주화 운동 유족들에 의해 끈질기게 불리어 졌으며 급기야는 기념일로 지정되고 기념식순에서 모두가 함께 제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제창에서 합창으로 변경한후 아직까지도 정치논리속에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제 광주민주화 운동 36주년이 다가온다.
여.야 모두가 제창을 하자고 하는 이시점에 통합과 소통의 정치를 보여야 할 이 정권이 여소야대의 이 정국속에 어떤 정치적 지혜를 보여줄지 그 시금석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이 될것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