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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일모(九牛一毛 )의 슬픈 이야기

최재춘 2015. 12. 16. 10:50

구우일모(九牛一毛 )는 아홉마리의 소중에 한가락의 털을 이야기 한다.

보통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이 즉 망망한 바다속의 좁쌀 한톨을 이야기 하듯 보잘것 없고 하찮은 존재를 이야기 할때 사용한다.

그러나 이 구우일모에는 슬프면서도 한 인간의 역사에 대한 장엄한 서사시가 함께 녹아들어가 있다.

우리는 중국의 역사서를 이야기 하면 보통 사마천의 사기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사마천이 어떤 조건에서 중국 최초의 역사서를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는 잘 모른다.

때는 BC99년 한나라 무제때 북방 흉노족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던 한나라의 장수 이릉은 5000의 결사대를 가지고 흉노족 8만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나 결국은 흉노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자 한무제는 이릉의 가족을 참수시키려고 하였으며 이때 어느 신하 단 한명 나서지 않았으나 사마천이 나서서 이릉의 용감함을 대신 이야기 하니 한무제는 대노하여 사마천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그러나 사형대신 선택이 가능한 형벌이 있으니 그것이 궁형이라 일컫어지는 생식기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이 사마천에게 모든 역사관련 자료를 넘겨주며 올바른 역사서를 쓰라고 하였는바 사마천은 장열하게 선비답게 죽음을 택하지 않고 치욕스러운 궁형의 벌을 택한것이다 ..

이때 그의 나이 47세였다.

이후 8년에 걸쳐 중국 최초의 역사서 사기를 완성하였다 .

그리고 그의 친구에게 소회를 적으면서 만일  "내가 법에 의하여 사형을 받아도 아홉마리의 소 중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 뿐이니, 나와 같은 자가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세상(世上) 사람들은 내가 이런 수치스런 일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졸장부라고 여길걸세"

라고 한탄을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따라서 그 치욕을 견디며 오늘날 중국의 역사앞에 우뚝 서 있는것이다.

만일 사마천이 당당하게 죽음을 선택했으면 사마천의 이름은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구우일모(九牛一毛 )처럼 역사속에 사라졌을 것이나 그는 준엄한 역사의 임무를 잊지 않고 그 수모속에서도 역사를 기록하고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것이다.

그런데 문득 돌이켜 보니 BC99년은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아직 신라(BC57년)도 고구려(BC37년)도 백제(BC18년)도 탄생하지 않은 시기가 아닌가?

BC206년 항우와 유방이 저 광활한 대륙을 두고 건곤일척을 다툴때 우리 민족은 어디에 있었는가

BC 551년공자가 인의예지를 논할때 우리선조들은 무엇을 논했더란 말인가?

잃어버린 우리 고조선의 역사는 어디에 있는가? 

구우일모를 보면서 아직 태동도 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에 비해 장엄한 중국의 역사가 한편으로는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분명 어딘가에 있을 우리의 또다른 고대 역사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