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성냥공장..
어렸을적 불렀던 노래중 인천에 성냥공장 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하면서 불렀는데 조금은 외설적인 부분도 있던 노래였다 하지만 이 노래속에는 어렵고 힘든 시절 우리들의 누이 언니의 애환이 함께 녹아 들어가 있었다.
1918년도 일제에 의해 최초로 인천에 성냥공장이 세워졌고 그때 우리의 누이들은 하루 13시간 서서 1만개 이상의 성냥개비를 만들어야 했고 임금으로 60전을 받는 열악한 삶들을 살아야 했던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냥은 언제 들어왔는가?
1880년 개화승 이동인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성냥을 들여왔고 그 이전 조선에서는 부싯돌로 불을 지폈던것이다. 그 이후 일본은 1910년 한일 늑약을 통해 우리를 병합하고 1918년도에 인천에 최초로 성냥공장을 세우고 성냥 한곽에 쌀 한되를 받으며 독점을 하였다.
해방되기까지 절대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으며 일제는 성냥 제조 독점을 하였으나 해방후 여기저기 수많은 성냥공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어렸을적 가장 많이 본 상표는 화랑표, 비사표, UN, 아리랑, 향로, 두꺼비표, 제비표, 새표, 봉황등 그 종류도 여러 종류였다.
지금은 라이터와 전기에 의해 그 명맥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성냥 한때는 집 부엌부터 선반 재떨이 옆등 여기저기 몇곽씩 쌓여 있던 성냥이건만 요즈음 행사때 기념품으로 만드는 정도로 보기 힘들어진것이 성냥이다.
어렸을적 겨울 사랑방에 모여 가끔씩은 성냥개비 따먹기 하며 놀았던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기술의 발달로 사라져 버리는 상품중 하나가 되버린 성냥!
지금 우리나라에도 마지막 성냥 공장이 경북 의성에 성광성냥으로 남아 있다고 하던데 소비가 없는 상태에서 언제까지 버틸지는 아무도 모를것이다.
19세기 획기적인 발명품 성냥 채 200년이 가기도 전에 또다른 새로운 기술앞에 존재감을 상실해 가고 있는 성냥의 뒤안길을 보면서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의 슬픈 애환도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아스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