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 노래 슬픈사연
남도의 한의 노래 부용산 나는 최근에야 이 노래가 호남에서 입으로 입으로 구전된 유명한 노래라는 것을 알았다 왜 나는 몰랐을까 엉뚱하게도 이 노래는 금기시되는 색깔론의 최대의 피해곡이었다.
단지 해방후 빨치산들이 많이 불렀다는 이유로 더 이상 불리여질수 없었고 아무도 모르게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노래 부용산 그 노래를 쫒아가다보면 60년이 넘는 슬프고 애잔한 노래만큼이나 서글픈 사연이 전해져 온다
이 노래말을 쓰신 박기동 선생님은 일본에서 유학하시고 해방후 벌교에서 교편을 잡고 계실때 여동생 박영애가 18살에 시집을 가 24살에 병으로 먼저가게 되고 그 누이를 벌교 부용산에 묻고 되돌아 와서 글로서 그 슬픔을 쓰니 그 글이 부용산 노래말이었다
그후 박기동 선생님은 목포 항도여중(현 목여고)으로 전근을 오시게 되고 거기에서 문학의 천재소녀 김정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김정희 학생도 백일장 전국대회 대상을 수상하고도 항도여중 3학년때 병으로 죽게되고 그 슬픔을 당시 음악선생님인 안성현 선생님이(엄마야 누나야 작곡가) 부용산 노랫말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부르기 시작한다.
이렇게 슬프고 슬픈 제망매가(祭亡妹歌) 애제자가(哀弟子歌)로 탄생한 부용산은 이후 호남인들의 애창곡이 되고 특히나 여동생을 그리워 하던 빨치산들이 자주 부르게 되니 어느새 금지곡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후 박기동 선생님은 숱한 감시와 핍박속에 호주로 이민을 가게되고 노래는 전설이 되어 남도에서 남모르게 불리어져 왔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노래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였고 목포에서 벌교에서 부용산을 기리는 시비가 제막되고 노래가 힘차게 합창되고 있다.
애절하다 못해 한이 되어버렸던 부용산 이제는 한영애가 부르고 이동원이 부르고 안치한이 부르는 꽃다운 나이에 먼저간 여동생 먼저간 애제자를 그리워 하는 노래 부용산
오늘은 부용산 노래를 그 사연만큼이나 애절하고 그리움을 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고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