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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로의 추억

최재춘 2013. 5. 24. 08:04

지금은 고향에 가 보면은 모든 길이 아스팔트로 자동차가 다닐수 있도록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다. 그러나 어릴적 우리가 다녔던 길은 그러하지 않았다. 일명 “신작로”라는 길이 있었다.

말 그대로 차량이 다닐수 있도로 새로 만든 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신작로에는 애환서린 서글픈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1년 일제는 한국지배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전국에 741km에 달하는 신작로를 건설하였다.

일제는 새로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해당하는 토지를 강제로 보상없이 빼앗았고 그 길을 만들기 위해 그 지역의 주민들을 강제 노역 시켰던 것이다

일제는 대외적으로는 신작로 건설을 통해 총독부의 치적을 과시하려고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군사적 목적과 곡물을 원활하게 수탈하기 위해서 곡창지대와 항구지역에 수많은 신작로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애환서린 고향의 신작로를 우리는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동안 걸어서 다녔다 태천리 자동리 봉리 내양리 감정리 모두가 어린 학생들에게는 쉽지 않은 거리 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새벽밥 먹고 가방하나 둘러 메고 터벅터벅 걸어 다녔던것 같다.

 고등학교때쯤 버스가 운행되어서 걸어 다니는 어려움을 대신하였지만 흙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가면서 우리는 그날그날 친구들과 함께 깨알같은 추억들을 만들곤 하지 않았나 생각을 해본다.

부모님들도 장날만 되면 그 신작로를 통해 맛난것 좋은 때때옷들을 한아름 사들고 오셨고 때론 오랜만에 옆동네 갑장을 만나신 아버지들은 막걸리와 흥에 취해 그 십리길 신작로를 이십리길 삼십리길 처럼 걸어 오시곤 하였다.

요즘은 여기저기 둘레길을 만들어 건강을 생각하며 걷기도 하는데 어릴적 우리가 걸었던 그 신작로길은 지금 생각해보면은 건강 웰빙 등교길이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어린 그때는 힘든 등교길 이었지만 지금 그나마 우리가 체력적으로 어디서든 뒤지지 않은것도 바로 어릴적 신작로길의 영향이 결코 무시할수는 없으리라 생각되어진다.

딱딱하지 않은 풋풋한 신작로 흙길.. 흙먼지 날리면서 그 길을 걷고 싶은데..이제는 모두가 딱딱한 아스팔트로 변해버리고...

멀고 힘든 등교길이진만 친구가 있었기에 함께 할수 있었던 그 신작로길..

인생의 새로운 신작로에도 친구들이 함께 하고 있어 우리는 외롭지 않게 갈수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