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기쉬운 우리 역사..
(적거리 고인돌)
우리 마을에는 어려서 부터 놀던 커다란 넓적 바위가 있었다 추석날이면 바위 주변에 모여서 음식도 나누어 먹고 그야말로 놀이터나 다름 없었다.
어렸을적 기억하기로도 약 10기가 넘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은 바위가 약 5기 정도 남아 있는것 같다. 학교를 다니면서 이것이 무덤의 한 양식이라는걸 알았다. 청동기 시대 무덤의 한 양식으로 남방식과 북방식이 있는데 우리 동네에 있는것은 남방식이다 북방식은 밑에 바침돌이 상당히 높은 형식이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 바위를 고인돌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이름으로는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왜 고인돌이라고 하였을까 하고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사책들을 읽다가 보니 너무나 쉬운 말을 내가 너무나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말 그대로 큰돌을 작은 돌로 고여 놓아서 고인돌이라고 불렀던것이다.
학교 다닐때 국사 시간에 선생님이 이렇게 쉽게 설명을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우리는 조선시대 관직을 가지고 있던 지배층 사람들을 양반(兩班)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바로 무과에 급제한 무반(武班)과 글로서 과거에 급제한 문반(文班)을 합쳐 두반을 두량자를 사용하여 양반이라고 불렀던것이다.
또 가끔씩 티브 사극을 보면은 신하들이 왕에게 "전하 종묘사직을 지키셔야 합니다" 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종묘 사직은 무엇이며 왜 이것을 지키라고 신하들은 왕에게 강요하는가.
유교 사회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조상에 대한 예는 지극하였다 여기서 종묘는 바로 선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제사때 연주되는 음악은 종묘 제례악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즉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들을 모신 사당으로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있어서 그 중요성은 말할 나위가 없었던 정통성의 문제였던것이다.
사직은 토지의 신을 의미하는 사(社)와 곡식의 신을 의미하는직(稷)으로 농업이 생활의 전부였던 조선시대에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단을 세워 제사를 올렸고 이 사직단이 바로 종묘와 함께 조선시대를 지탱한 정통성의 근거였던것이다.
지금은 사직단이 단만 남아있고 그 주변은 공원으로 만들어져 사직공원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지방에도 사직단들이 공원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나라는 농업이 아닌 반도체, 전자, 철강, 조선, 화학,등 중화학 공업이 주를 이루고 있는데 어디에다 중화학 공업의 신을 모시는 단이나 세워야 하는것은 아닌지...